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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일요신문] '광복 70주년 발굴특집' 이시영 일가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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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5-06-16 10:38 조회6,3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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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스토리] '광복 70주년 발굴특집' 이시영 일가 독립운동사
 
 
[일요신문]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나라를 잃었다 다시 찾은 지 70년이라는 얘기다. 일제 식민통치 36년 동안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을 온몸과 마음으로 견뎌내야 했다. 겉으로는 외세에 의한 해방이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수많은 독립투사들 가운데 최근 더욱 주목받는 이들이 있다.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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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7일 성재 이시영 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이 남산공원에서 열렸다.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연합뉴스

이들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들 가문이 조선 시대에 문벌이 높은 집안이었으며 알아주는 대부호였음에도,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60여 명의 가족들이 1910년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을 보여 준 이들의 삶은 그야말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이들의 삶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의 전시회 등이 꾸준히 개최되고 있는 가운데, <일요신문>이 이들의 힘겨웠던 독립운동사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들 형제 중 임시정부 활동 등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손녀를 통해서다.

이시영 선생 집안은 조선 대대로 고위 문무 관료를 수없이 배출한 손꼽히는 명문세가였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 선생의 10대손으로 태어난 이시영 선생 형제들은 1910년 8월 경술국치조약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 투쟁을 위한 중국 망명을 결정한다.

결혼 전에 일찍 죽은 소영과 두 명의 여자 형제를 제외한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6형제는 모든 재산을 급매해 현재 가치 추산 6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들고 만주로 향한다. 둘째 석영이 아들이 없던 당숙부인 영의정 귤산 이유원 선생 댁에 양자로 들어갔던 것이 자금을 모을 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망명길은 부부동반에 자녀, 손자 까지 60여 명의 대장정이었다. 이 때문에 한날한시에 가되 가는 길도, 가는 방법도 달랐다.

“한꺼번에 가면 왜놈들에게 다 드러나니까, 밤에 조를 짜서 몰래 이동했어요.”

이시영 선생의 손녀인 이재원 씨(65)가 최근까지 평생 모시고 산 어머니 서차희 씨로부터 틈 날 때마다 들은 옛날 얘기다. 허허벌판인 만주에 정착해 1911년 독립군 양성 목적의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명)를 세우기까지 과정도 녹록지만은 않았다. 가자마자 맨 먼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머리부터 잘랐다. 중국인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변발에 이어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땅을 팔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애를 먹었다. 이에 둘째 석영이 꾀를 냈다. 형제들 중 제일 신수가 훤했던 석영이라면 가능해 보였다. 단신이었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석영은 장신이기도 했다. 석영은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말끔히 차려 입었다. 이어 가마를 빌려 타고 거리를 나갔다. ‘황제가 나타났다’며 거리의 중국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땅을 살 테니 달라고 해도 중국인들은 도무지 팔지 않았어요. 돈이 있어도 지위가 없으면 땅을 살 수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땅을 사려면 위세를 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가장 신수도 잘 나시고 키도 크신 ‘석자 영자’ 할아버지가 앞장섰어요. 길을 가는데 가마에다가 죄다 엎드려 절을 했고 이후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군 양성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던 신흥강습소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몰려드는 조선의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잘 알려졌듯 이시영 선생은 수립 초기부터 임시정부에 깊숙이 개입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즈음부터 6형제는 중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식대로 독립운동을 벌여 나갔다. 신흥강습소를 제1회 특기생으로 졸업하고 이어 이 학교의 학감 및 군사과 교무, 교사 등으로 활동한 이시영 선생의 아들 규창은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서울로 향했다. 이시영 선생도 어린 자식 둘을 만주에 남기고 상해로 홀연히 떠났다. 이시영 선생의 가족 중에 만주에 남게 된 이는 아들 규열(재원 씨의 부친)과 그의 동생뿐이었다.

만주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자매를 모두 잃고 두 살 터울의 동생과 자신 둘만 남게 된 규열은 마지막 하나 남은 핏줄인 동생마저 이내 죽게 되자 16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찾아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상해 임시정부가 근거지라더라’는 말만 듣고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만주에서 상해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한 무모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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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열 선생(이시영 선생 아들)이 아내 서차희 여사, 큰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우여곡절 끝에 부자는 상해에서 극적 상봉을 맞는다. 이렇게 만나게 된 아버지였던 만큼 규열에게 아버지는 평생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했던 규열은 변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중국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능통했다. 이런 이유로 상해에서 영국인 버스 회사에 취직해 통역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서울로 돌아간 형 규창 등이 규열의 혼사를 주선했고, 규열은 혼례를 위해 잠시 서울로 돌아왔다. 일제에 줄곧 쫒기는 삶을 살고 있던 이시영 선생은 아들의 결혼식에 물론 참석할 수 없었다. 결혼식은 서울의 천도교예식장에서 거행됐으며 주례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맡았다.

재원 씨는 “그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홍조’라는 개성 부자가 소문을 듣고 부모님 결혼식에 축의금으로 50원인가 500원인가 했다고 하더라”고 회고 했다. 규열 부부는 결혼 보름 만에 축의금을 몽땅 싸 들고 상해로 떠났다. 당시 걷힌 상당한 액수의 축의금은 모두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상해의 한 허름한 여관방에서 시아버지인 시영을 처음 만난 서차희 씨는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쏟았다. 사는 곳이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었고 냄비마다 안 찌그러진 게 없었다고 한다. 규열은 영국인 회사에서 매달 월급을 받으면 가족의 최소 생활비만 빼고 아버지와 백부인 이석영 선생에게도 돈을 가져다 드렸다.

“월급날이면 아버지는 종을 부려 은전이 가득 든 보자기를 메고 와서 큰 대야에 쏟아 부었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돈을 생활비, 할아버지 드릴 돈, 석자 영자 할아버지 드릴 돈 등으로 나눴죠.”

이시영 선생은 중국 각지를 떠돌며 임시정부 활동을 이어갔다. 드넓은 중국 땅이지만 규열 부부는 월급을 받으면 꼭 연휴 기간 동안 육포 등 각종 건어물, 생활비, 소금, 상하지 않는 밑반찬 등을 준비해 열차를 타고 물어물어 매달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규열)는 매우 사교적인 분이셨다고 해요. 기차를 타면 1등 칸부터 10등 칸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며 중국인들과 인사하고 얘기하고 그러셨대요. 일본인들의 동향을 파악할 목적도 있었죠. 어머니와는 실수로라도 한국말을 할까봐 늘 떨어져 앉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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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유동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시영 선생 묘소.

이렇듯 애틋하게 아버지인 시영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간직하고 살아오던 규열은 한동안 이시영 선생과 연락이 닿지 않자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다. 매일 일제에게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둔 업보였던 셈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못 보자 잠도 못 자고 입술도 부르트고 얼굴에 핏기도 하나 없이 애도 안 어르고 그러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고 해요. 당시 일제가 영국인 회사에까지 압박을 넣어 아버지는 넉 달간 실직 상태였죠. 그래서 어느 날 밤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내가 놔 줄 테니 당신 아버지를 찾아 가세요’라고 했다더군요. 애들 데리고 서울로 가 있을 테니 해방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그런 설득의 과정이 이어지던 중에 해방이 됐답니다. 귀환하는 교포들을 위해 중국인들이 배를 구해주긴 했는데 배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한 군데 모아 놨다더군요. 허허벌판에다 가마니때기로 임시 거처를 만들고 그렇게 며칠을 머문 끝에 부모님은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애초 중국에 갈 때는 60여 명이던 대가족은 많은 자손들이 중국에서 계속해서 태어났음에도 올 때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6형제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시영 선생만이 살아서 조국 땅을 밟았다. 옥사, 병사, 아사 등 사인은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둘째 이석영 선생은 가족을 다 잃고 혼자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인 규서가 자신의 동생인 이회영 선생을 일제에 밀고했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석자 영자 할아버지는 상해에 가고 나서부터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하셨답니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다 비참하게 죽은 아들에 대한 한탄으로 독방에 칩거하시며 늘 말씀도 없이 침울하게 지내셨대요. 아무리 나라가 망해서 그렇다고 쳐도 ‘땅 다 팔아 갖고 중국까지 와서 다 죽어버리면 우리 이 씨 집안이라는 것은 문 닫아 없어져 버리는 것 아니냐’고 자책하며 하늘을 안 보셨다고 합니다. 제사도 못 모시는 자신을 ‘하늘을 못 보는 죄인’이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1945년 11월 조국 땅을 밟은 이시영 선생은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한 달 앞두고 초대 부통령에 선출된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국정 운영에 반발해 1951년 자진사퇴한다. 이시영 선생은 1953년 4월 피란지인 부산에서 “완전 통일의 그날을 못보고 눈감으니 통한스럽다”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들인 규열은 이시영 선생보다 3개월 정도 앞서, 뇌출혈로 추정되는 병환임에도 난리 탓에 병원 치료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한 달간 집안에서 앓다가 40대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